화서 이항로의 시대인식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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작성일 22-11-15 22:48본문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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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867년(고종 4) 경연특진관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3월 18일 벽계 향리에서 별세하였다. 이 때 1개월 여 강화섬을 약탈하던 프랑스군을 문인 양헌수가 순무천총으로서 정족산성 (정족산성)에서 격퇴했다는 소식을 듣고, 소를 올려 징계하고 삼가야 할 요점을 아뢰고 이어 만동묘의 복원을 청한 뒤 사직, 고향 양평 벽계로 돌아왔다. 그러나 존화양이라는 춘추대의에 입각한 척사 이론(理論)이 실제로 잘 시행되지 않음을 보고, 병을 이유로 사직소를 올리자 동지의금부사에 임명되었다. 이어 전라도도사·지평·장령 등을 역임한 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동부승지가 되어 위정척사에 입각한 주전론을 적극 주장하였다.
이때 병의 증상을 말하면서 경복궁(경복궁) 중건(중건)의 중지와 부역과 취렴의 시정을 촉구하고 상벌의 마땅하지 못한 것과 서양文化(culture) 의 유통을 근절해야 한다고 거듭 건의했으나 임금은 의례적인 비답만을 내릴 뿐이었다. 또 소학(소학)과 주자가례를 근본으로 삼고, 4서(사서)를 주(주)로 삼았으며 경서의 주석을 비롯하여 주자대전(주자대전), 주자어류(주자어류), 송자대전(송자대전) 등을 애독하면서 제자들에게도 이를 권장하였다.화서이항로의시대인식 , 화서 이항로의 시대인식경영경제레포트 ,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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화서 이항로의 시대인식에 대한 글입니다. 얼마 뒤 공조참판에 승진하여 政府(정부)당상에 임명되고 부총관을 겸하게 되었는데, 세 번 상소하여 이를 사양하였다. 이때 임금이 그 주장을 채택하여 중외(중외)에 포고하고 전수를 정론(정논)으로 삼았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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화서이항로의시대인식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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다.
그는 조선말기에 가장 저명하고 影響력 있는 성리학자로서 학설은 주리론(주리논)으로서 우주론(자주논)에 있어서는 이원론(이원논)을 주장하였다. 또 시무론(시무논)에 있어서는, 전제(전제)개혁은 토지겸병을 막기 위해서라도 공전(공전)의 제도를 채택할 것과 기민(기민)구휼을 위한 사창(사창), 풍속교화를 위한 향약, 병농의 일원화를 위한 부병제의 시행 등을 주장하였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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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862년(철종 13) 이하전의 옥사가 일어나 김순성의 무고로 하옥되었다가 무죄임이 밝혀져 석방되고, 1864년(고종 1) 1월 장원서별제가 되었다.